골목을 돌아 동네 슈퍼앞을 지나는데 달콤한 복숭아 향기가 코로 파고든다. 나도 모르게 과즙이 흥건한 복숭아를 깨문 듯 입안에 침이 고인다. 복숭아 한 상자에 25,000냥. 이렇게 써져있다. 10개도 들어 있지 않는 것 같은데, 25,000이라니! 고인 침을 삼키고 시선을 돌린다. 대신 오늘 모임에선 시원하고 달콤한 복숭아 아이스티를 마시기로 마음을 굳혔다.

 

 늦여름 이라고는 해도 아직 날씨는 사우나처럼 더웠다. 빠른 걸음으로 걷다 보니 오랜만에 꺼내 입은 빳빳한 칼라티셔츠가 불편할 정도로 땀이 흐른다. 어느새 목 칼라는 땀에 젖어 내 목에 마른 낙엽처럼 달라 붙어있다. 냉방이 잘 되는 곳이라면 그 어떤 가게라도 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다행히 저만치 모임이 있는 카페가 보인다. 나는 전력을 다해 카페로 뛰어 들어갔다.

 

 이 모임을 간단히 말하자면, 행정고시 시험공부를 위한 스터디 모임이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히 이 모임 전 기수 선배들이 찾아와 시험합격 노하우를 설명해준다고 했다. 물론, 행시에 합격한 선배들이다. 긴 테이블 맞은 편에는 누가 봐도 위풍당당한 선배들이 주르륵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선 이상한 후광 같은 것이 있어서, 칙칙한 행시 준비생들과는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에 특히나 자부심이라는 기브스를 자신의 목과 어깨에 두른 것 같은 한 선배가 눈에 띄었다.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강력하게 자신의 성공담을 설파하고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후배들을 야단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 늦은 나는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구석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경외의 눈빛으로 설파중인 선배를 바라보느라 녀석들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무안한 마음에 나는 음료 주문을 하기 위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한참 이야기 중이던 그 선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이! 뭐 마실래?”

“아, 네? 저는 복숭아 아이스티를 마시려고…...”

“그래? 오늘은 내가 쏘기로 했어. 카드 가지고 가.”

“아, 네! 감사합니다.”

 

 카드를 내게 넘긴 선배는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자신의 무용담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복숭아 아이스티를 주문하고 나서야, 나는 땀을 닦았다. 땀에 젖었던 목 칼라는 그제야 목에서 떨어졌다.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잠시 뒤를 돌아봤다. 저만치 모임 사람들과 선배들이 보인다. 나는 사실 조금 의아했다. 그저 스터디 모임일 뿐인데, 선배라고 음료를 사주다니. 개인주의가 만연한 요즘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나는 어느새 선배가 건네 준 카드를 슬쩍 쳐다 본다. 선배의 이름과 함께 고급 금장이 둘러진 신용카드는 내가 이런 사람이야 보여주는 명함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 어쩌면 선배는 자신이 쏜다는 핑계로 자신의 우월함을 아니, 자신의 성공을 이 카드로 뻐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오늘 공짜로 음료를 마실 수 있으니 고마운 일 아닌가? 그 잘난 자존심은 갔다 버려야 한다는 것을 나는 행정고시생이 된 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어이! 혹시 상문고등학교 나오지 않았어?”

“아, 네. 어떻게 아세요?”

“역시, 눈에 익다 했더니. 나도 상문이거든.”

 

자신의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 선배는 다시 내게 이렇게 말을 걸었다. 그러더니 선배는 뜬금없이 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늘어 놓으며 내 공감을 얻어내려고 애를 썼다. 결국, 옛 이야기에 흥분한 선배는 자신이 오늘 저녁까지 책임지겠다며 모두를 이끌고 고깃집으로 향했다. 모임 사람들은 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물론, 나도 그랬다. 하지만, 가난한 수험생이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 또한 알았다. 모임 친구들은 모두가 고등학교 후배인 내 덕분이라며 흡족해 했다. 그렇게 이어진 술자리에서 선배의 자랑스런 성공담은 이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은 엄마의 잔소리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자 술과 고기로 자신의 배를 채운 사람들은 하나 둘씩 갖은 핑계를 대며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배의 눈길을 한 눈에 받고 있는 나는 정말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아까부터 가고 싶던 화장실도 갈 수 없었다. 그렇게 또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자리에는 선배와 나 단 둘이서만 남게 되었다. 술이 취해 횡설수설하는 선배를 바라보며, 나 또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떻게든 이 술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나는 선배에게 자리를 옮기자는 제안을 했다. 그제야 선배는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의 대단한 카드로 계산을 하고 가게 문을 나서는 선배의 뒷모습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본다. 이상하게 쓸쓸해 보인다. 불쌍해 보일 만큼. 이런, 나도 술이 취했나 보다. 나 같은 고시생이 합격한 선배를 측은하게 생각하다니. 나는 얼른 마음을 고쳐 먹고, 선배를 따라 가게 문을 나섰다.

 

 다행히 밤 공기는 낮과는 다르게 꽤 상큼했다. 결국, 그렇게 패악을 부리던 여름도 가고 있는 것이다. 취업이라는 것도 시험이라는 것도 이런 계절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이 흐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취업을 하고 사회인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선배가 어느 과일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나도 걸음을 멈춘다. 선배는 예쁘게 쌓아놓은 복숭아 상자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복숭아 한 상자에 30,000원. 아침에 동네 슈퍼에서 봤던 것과 비슷해 보이는데, 5천원이나 비쌌다. 비싸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까처럼 군침이 흐르지는 않는다.

 

“복숭아 드시고 싶으세요?”

“어, 아니야. 지금은. 근데, 예전엔 저 복숭아를 상자째 사서 배부르게 먹는 게 꿈이었지.”

“하하, 시험 합격하고 나서 소원 푸셨겠네요.”

“아니, 아직 못해봤어.”

“왜요? 지금은 당장이라도 하실 수 있잖아요.”

“이거라도 꿈으로 남겨 두고 싶어서.”

“네?”

“꿈이라고 이루고 났더니. 그게 정말 꿈이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못 이룬 꿈

하나는 그냥 남겨 두려고.”

 

 솔직히 나는 선배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선배는 자신이 바라던 그 어떤 것을 이룬 나비 같은 사람이고, 나는 아직 그 어떤 것을 꿈만 꾸며 사는 애벌레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과연 행정고시 합격이 정말 내 인생의 꿈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그 꿈을 이루고 나면, 나는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나와 같은 꿈을 꾸고 달려갔던 선배는 지금 복숭아 상자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이미 꿈을 이룬 사람인데, 선배는 생각보다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의 나보다 더 측은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나 선배의 꿈은 잘못된 것일까? 어쩌면, 복숭아를 실컷 먹고 싶은 꿈이 더 대단해 보일 정도로. 그렇게 내 꿈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일까? 아니, 어쩌면 나는 살기 위해 택한 본능과 꿈을 헷갈려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복숭아 좋아해?”

“네, 무지 좋아합니다.”

“아저씨! 복숭아 한 상자 주세요!”

 

 선배는 내게 꽤 무거운 복숭아 상자를 안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간다. 하지만, 손을 흔들며 잘 가라는 말을 대신한다. 나는 비틀거리는 선배의 뒤를 따라 걷는다. 탐스러운 복숭아 향이 코를 간지럽게 파고든다. 갑자기 모든 고민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 꿈이 어떻든지, 내 미래가 어떻든지 오늘 밤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좋아하는 복숭아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끝.

 

 

 

 

 

 

 

아이유 - 복숭아 (노래가사)

 

자꾸 눈이 가네 하얀 그 얼굴에
질리지도 않아 넌 왜

슬쩍 웃어줄 땐 나 정말 미치겠네
어쩜 그리 예뻐 babe

뭐랄까 이 기분
널 보면 마음이 저려오네 뻐근하게

오 어떤 단어로 널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 이 세상 말론 모자라

가만 서 있기만 해도 예쁜 그 다리로
내게로 걸어와 안아주는 너는너는너


You know he's so beautiful
Maybe you will never know
내 품에 숨겨두고 나만 볼래

어린 마음에 하는 말이 아니야
꼭 너랑 결혼할래

오 어떤 단어로 널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 이 세상 말론 모자라

가만 서 있기만 해도 예쁜 그 다리로
내게로 걸어와 안아주는 너는너는너


몇 번을 말해줘도 모자라
오직 너만 알고 있는
간지러운 그 목소리로
노래 부를 거야 나 나 나 나

자꾸 맘이 가네 나 정말 미치겠네

 


Posted by rose602